初代 總會長織을 물러..(박성기목사)
본문
初代 總會長織을 물러나면서.....
總會長織을 물러나면서 나는 몇 가지 일을 밝혀두고자 한다.
브니엘 總會가 組織된 후 하나님의 恩惠로 오늘까지 꾸준히 성장해 왔다.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이 總會가 하나님의 恩惠로 계속 發展하여 地上에서 하나님의 뜻을 만족하게 이루어 드리는 거룩한 機關으로 成長해 나가기를 바란다.
1. 브니엘 總會에 속한 모든 회원들이 한가지 確認하고 矜持를 가지며 앞으로도 꼭 명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40년 前 브니엘 운동이 시작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人 爲的인 動機가 介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전개되어 나갈 브니엘 복음운동에 있어서도 이러한 動機의 純粹性이 유지되길 바라며 人爲的인 動機가 결코 介 在되지 않기를 바란다.
2. 브니엘이 한 敎團으로서의 存立理由를 분명히 해야할 때가 왔다는 사실이다.
나는 敎團을 組織함에 있어 두 가지 質問에 대한 答을 얻고자 애써왔다. 그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셨을까 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質問에 대한 해답이 敎團 存立의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째 質問인 하나님의 뜻이냐 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게 되는데 그 뜻을 찾아내기는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腐敗한 人間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 놓고 하나님의 뜻으로 合理化시키는 傾向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제각기 體驗을 통한 어떤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하나님의 뜻을 分別 하고자 할 때
1) 動機가 純粹한가
2) 周邊 環境이나 與件이 어떠한가
3) 方法이 聖書的인가
라는 것을 살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된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내 良心이 나의 動機의 순수성을 나에게 밝혀줄 것이다. 그 動機가 정말로 純粹하면 하나님의 引導하심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주어진 與件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할 때가 많다는 것 을 우리는 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면 時間的으로 이미 지 난 일이므로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許諾으로 섭리 중 이루어 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브니엘의 存立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수 없이 되풀이되는 같은 質問에서 나 는 結論的으로 브니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靈魂들이 救援함을 받았고 브니엘 운동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받아 福音現場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이는 정녕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셨나 라는데 대한 當爲性은 나로서는 아직 찾지 못했음을 告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內的苦悶에 시달려 왔다.
安息敎는 安息日 성수를, 그리고 聖潔敎團은 聖潔을, 救世軍 은 貧民救援을, 長老敎는 하나님의 主權的 使役을, 五旬節 교 파는 완전한 복음이 그들의 存在에 대한 當爲性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브니엘은 總會를 따로 組織해야 할만큼 내세울 當爲性 을 나는 찾지못했던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임을 確信하 면서도, 그러기에 더더욱, 그 當爲性을 찾으려고 애써 왔지만 아직도 그 解答이 地平線上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바로 이것이 나로서 여러분들에게 남기고 싶은 課題이다.
話題를 바꾸어서 몇 마디 말씀을 添加하고자 한다. 나는 어려서 劇的으로 주님을 만난 후 無爲無識 중에 한 가지 신드롬에 사로잡혀 한없이 괴로움을 당해 왔다. 평생을 이런 强迫觀念 의 壓迫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것은 ‘나는 남이 닦아놓은 터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다’ 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터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두 가지 相衝되는 생각 속에서 한없는 괴로움을 당했다.
高麗神學校에 入學하면서부터 旣存 틀 속에 나를 가두어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없이 고민하였다. 中心에서 우러나는 소리는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餘生을 마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頑强하게 牧師按手 받기를 拒絶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最終的으로 宣敎會와 提携하면서부터 나의 煩悶은 더 커졌다. 나의 움직임이 자칫하면 우리 나라에 또 하나의 敎派를 形成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當爲性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런 材木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마다 苦悶하면서 煩悶하던 중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原點으로 되돌아가서 解決策을 찾으 라는 靈感 같은 것을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宣敎會의 支援을 받아 傳道人을 動員하여 家家戶戶 방문 전도를 하고 天幕을 끌고 다니면서 天幕集會를했다. 그 때 만일 敎團組織을 念頭에 두었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반발하였다.
브니엘敎會가 設立이 되었고 서울 大興第一敎會가 設立이 되었다. 그 후도 繼續해서 組織的인 운동을 拒絶해 왔다.
이제 敎團이 組織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음을 確 認하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바랄 뿐이다.
3. 이런 時點에 서 있는 브니엘 總會 모든 회원은 자신들이 歷 史的인 現場에서 있음을 自覺해야 할 줄 안다. 하나님의 뜻을 嚴肅하게 自覺해야 할 것이다.
東京大學院에서 海洋水産學을 공부하고 있던 정정환 博士와의 대화를 종종생각한다. 그는 보기 드문 天才였으나 촌 에 서 자라 視野가 넓지를 못했다. 미국에서 歸國하던 길에 東 京 식당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남긴 몇 마디 말을 나는 늘 잊지 못한다. “박목사, 나는 요즈음 우리 나라의 海洋水産界의 將來가 내 어깨에 달려 있다는 이 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게 나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그럴만한 材木도 되지 못하면서 말이야!” 라는 것이었다.
그는 勘當할 수 없을만한 무서운 무게의 짐을 지고 서 있는 자신을 自覺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自覺 후에는 決斷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自覺한 使命을 遂行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결단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과거와의 訣別이다.” 내가 自 覺한 使命을 수행하는데 거리낌 이 되는 모든 過去를 果敢히 淸算하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에 대한 愛着을 果敢히 정리하고 새로운 각오로 使命 意識에서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나는 여러분께 이것을 要求하고 싶다. 사명을 嚴肅히 自覺하고 決斷을 내려주기 바라다. 敎會를 끌고 갔다 왔다 하는, 갈까 말까 하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기 바란다. 敎會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우리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總會長織을 물러나면서 나는 몇 가지 일을 밝혀두고자 한다.
브니엘 總會가 組織된 후 하나님의 恩惠로 오늘까지 꾸준히 성장해 왔다.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이 總會가 하나님의 恩惠로 계속 發展하여 地上에서 하나님의 뜻을 만족하게 이루어 드리는 거룩한 機關으로 成長해 나가기를 바란다.
1. 브니엘 總會에 속한 모든 회원들이 한가지 確認하고 矜持를 가지며 앞으로도 꼭 명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40년 前 브니엘 운동이 시작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人 爲的인 動機가 介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전개되어 나갈 브니엘 복음운동에 있어서도 이러한 動機의 純粹性이 유지되길 바라며 人爲的인 動機가 결코 介 在되지 않기를 바란다.
2. 브니엘이 한 敎團으로서의 存立理由를 분명히 해야할 때가 왔다는 사실이다.
나는 敎團을 組織함에 있어 두 가지 質問에 대한 答을 얻고자 애써왔다. 그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셨을까 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質問에 대한 해답이 敎團 存立의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째 質問인 하나님의 뜻이냐 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게 되는데 그 뜻을 찾아내기는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腐敗한 人間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 놓고 하나님의 뜻으로 合理化시키는 傾向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제각기 體驗을 통한 어떤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하나님의 뜻을 分別 하고자 할 때
1) 動機가 純粹한가
2) 周邊 環境이나 與件이 어떠한가
3) 方法이 聖書的인가
라는 것을 살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된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내 良心이 나의 動機의 순수성을 나에게 밝혀줄 것이다. 그 動機가 정말로 純粹하면 하나님의 引導하심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주어진 與件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할 때가 많다는 것 을 우리는 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면 時間的으로 이미 지 난 일이므로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許諾으로 섭리 중 이루어 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브니엘의 存立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수 없이 되풀이되는 같은 質問에서 나 는 結論的으로 브니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靈魂들이 救援함을 받았고 브니엘 운동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받아 福音現場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이는 정녕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셨나 라는데 대한 當爲性은 나로서는 아직 찾지 못했음을 告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內的苦悶에 시달려 왔다.
安息敎는 安息日 성수를, 그리고 聖潔敎團은 聖潔을, 救世軍 은 貧民救援을, 長老敎는 하나님의 主權的 使役을, 五旬節 교 파는 완전한 복음이 그들의 存在에 대한 當爲性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브니엘은 總會를 따로 組織해야 할만큼 내세울 當爲性 을 나는 찾지못했던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임을 確信하 면서도, 그러기에 더더욱, 그 當爲性을 찾으려고 애써 왔지만 아직도 그 解答이 地平線上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바로 이것이 나로서 여러분들에게 남기고 싶은 課題이다.
話題를 바꾸어서 몇 마디 말씀을 添加하고자 한다. 나는 어려서 劇的으로 주님을 만난 후 無爲無識 중에 한 가지 신드롬에 사로잡혀 한없이 괴로움을 당해 왔다. 평생을 이런 强迫觀念 의 壓迫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것은 ‘나는 남이 닦아놓은 터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다’ 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터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두 가지 相衝되는 생각 속에서 한없는 괴로움을 당했다.
高麗神學校에 入學하면서부터 旣存 틀 속에 나를 가두어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없이 고민하였다. 中心에서 우러나는 소리는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餘生을 마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頑强하게 牧師按手 받기를 拒絶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最終的으로 宣敎會와 提携하면서부터 나의 煩悶은 더 커졌다. 나의 움직임이 자칫하면 우리 나라에 또 하나의 敎派를 形成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當爲性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런 材木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마다 苦悶하면서 煩悶하던 중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原點으로 되돌아가서 解決策을 찾으 라는 靈感 같은 것을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宣敎會의 支援을 받아 傳道人을 動員하여 家家戶戶 방문 전도를 하고 天幕을 끌고 다니면서 天幕集會를했다. 그 때 만일 敎團組織을 念頭에 두었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반발하였다.
브니엘敎會가 設立이 되었고 서울 大興第一敎會가 設立이 되었다. 그 후도 繼續해서 組織的인 운동을 拒絶해 왔다.
이제 敎團이 組織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음을 確 認하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바랄 뿐이다.
3. 이런 時點에 서 있는 브니엘 總會 모든 회원은 자신들이 歷 史的인 現場에서 있음을 自覺해야 할 줄 안다. 하나님의 뜻을 嚴肅하게 自覺해야 할 것이다.
東京大學院에서 海洋水産學을 공부하고 있던 정정환 博士와의 대화를 종종생각한다. 그는 보기 드문 天才였으나 촌 에 서 자라 視野가 넓지를 못했다. 미국에서 歸國하던 길에 東 京 식당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남긴 몇 마디 말을 나는 늘 잊지 못한다. “박목사, 나는 요즈음 우리 나라의 海洋水産界의 將來가 내 어깨에 달려 있다는 이 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게 나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그럴만한 材木도 되지 못하면서 말이야!” 라는 것이었다.
그는 勘當할 수 없을만한 무서운 무게의 짐을 지고 서 있는 자신을 自覺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自覺 후에는 決斷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自覺한 使命을 遂行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결단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과거와의 訣別이다.” 내가 自 覺한 使命을 수행하는데 거리낌 이 되는 모든 過去를 果敢히 淸算하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에 대한 愛着을 果敢히 정리하고 새로운 각오로 使命 意識에서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나는 여러분께 이것을 要求하고 싶다. 사명을 嚴肅히 自覺하고 決斷을 내려주기 바라다. 敎會를 끌고 갔다 왔다 하는, 갈까 말까 하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기 바란다. 敎會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우리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